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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ip over the world/스페인

꽃보다 총각_스페인편_바르셀로나_가우디 건축

바르셀로나 2일차 


우리는 유로 자전거 나라를 통하여 가우디 집중투어 도보 여행 일일 투어를 신청 하였다.


모임 장소는 까탈루냐 광장 앞 하드록 카페 앞 


가우디에 대해서 잠시 알아 보도록 하자 

스페인 하면 가우디라는 건축가가 굉장히 유명하다고 하다.


안토니오 가우디

26세(1878년)58세(1910년)


1 개요 

안토니 가우디 이 코르네트(Antoni Gaudí i Cornet), 1852년 6월 25일 ~ 1926년 6월 10일

스페인의 천재 건축가. 또 다르게 표현하면 바르셀로나를 먹여살리는 건축가. 일반적인 천재와는 다르게 생전에 이미 대성공한 건축가로서 스페인의 아르누보 건축의 중심인물이기도 하며, 또한 스페인 건축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본명은 카탈루냐어식으로 '안토니 가우디(Antoni Gaudí)'지만 에스파냐어식인 '안토니오 가우디'로도 알려져 있다.

2 생애 

1852년 레우스(Reus)에서 태어났으며, 부친과 모친은 장인 집안이었다. 전기에 따르면 애늙은이였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고향 근처의 옛 유적을 복원하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바르셀로나 건축전문학교에 입학한 후 건축사 자격을 딴 후 시청 산하의 여러 프로젝트를 수주받으면서 건축가의 길을 걷게 된다.

1888년 카사 비센스[1]를 건축하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유명해지기 시작한다.[2] 그 후 카탈루냐의 명문가문 코미야스 후작가의 별장을 건축하면서 가우디 평생의 후원자 에우세비 구엘 백작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1883년에는 구엘 가의 가문 건축가가 되었으며[3] 이 시점부터 '구엘'이라는 이름이 붙은 건축물을 대대적으로 건축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아메리카와 직물산업을 기반으로 한 구엘 가문의 무제한에 가까운 후원이 있어서 가능했다.

이 와중에도 가우디는 바르셀로나에서 가장 유명[4]한 건축가답게 다양한 수주가 들어왔으며 구엘 가문과 관련된 작품들 외에도 다양한 건설작업을 하게 된다. 카사 바트요나 카사 밀라 등이 그 예라고 볼 수 있다.

1918년부터는 평생 동안 건축한 '성 가족 대성당(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 건설에 매진했지만 이런저런 재정문제 등으로 끝을 보지 못하고[5] 1926년 6월 7일 성당에 예배하고 돌아오던 길에 38호 전차에 치여 치명상을 당했다. 운전사는 지저분한 노숙자로 여기며 그를 길 옆에서 팽개치고 전차를 몰고 가버렸다. 사람들이 병원으로 데려가고자 택시를 찾았으나 꾀죄죄하게 입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3번이나 승차거부를 당한 끝에 4번째 운전사가 겨우 운전했지만 병원도 2곳이나 거부당해 할 수 없이 빈민들이나 치료받는 열악한 시설을 가진 무상 병원에 놔두고 가버렸다. 신분을 증명할 게 없어 이 병원에서도 방치되었다가 겨우 정신을 차린 그가 이름을 말하자 비로소 병원 관계자들이 경악하여 가우디의 친구들과 친척에게 연락했다.

장례식
서둘러 달려온 그들이 어서 다른 병원으로 옮기자고 말했지만 가우디는 "옷차림을
 보고 판단하는 이들에게 그래서 이 거지같은 가우디가 이런 곳에서 죽는다는 걸 보여주게 해라. 그리고 난 가난한 사람들 곁에 있다가 죽는 게 낫다"며 그대로 남았고 결국 6월 10일 73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그를 죽게 만든 38호 전차 운전사는 파직과 동시에 구속되었으며, 승차거부한 택시 운전사 3명도 불구속 입건되었다. 결국 택시 운전사 3명과 그의 입원을 거부했던 병원은 막대한 배상금을 가우디 유족에게 지급하라는 판결을 받았다. 그리고 장례식은 1926년 6월 12일 사실상 반(半)국장으로 치러졌고 유해는 가우디가 마지막까지 열정을 쏟았던 성 가족 대성당의 지하묘지에 안장되었으며, 다음과 같은 묘비명이 묘석에 새겨졌다.


ANTONIUS GAUDI 
CORNET 
REUSENSIS 
ANNOS NATUS LXXIV 
VITAE EXEMPLARIS VIR 
EXIMIUSQUE ARTIFEX 
MIRABILIS OPERIS HUJUS 
TEMPLI AUCTOR 
PIE OBIIT BARCINONE 
DIE X JUNII MCMXXVI 
HINC CINERES TANTI HOMINIS 
RESURRECTIONEM MORTUORUM 
EXPECTANT 
R I P
안토니 가우디 이 코르네트. 레우스 출신. 향년 74세. 
모범적인 삶을 살아온 사람으로 위대한 예술가이며, 경이로운 이 교회의 건축가. 
1926년 6월 10일, 바르셀로나에서 세상을 떠나다. 이 위대한 인간의 부활을 기다리며. 편히 잠들기를.

2000년대 초엽에는 성자로 시복할 것을 건의하는 운동이 있기도 하였다.[6] 하지만 당시 가우디의 친구들은 고인이 보면 비웃을 일이라면서 이런 걸 불쾌하게 여겼고 후손들도 반기지 않고 있다.

3 성향 

매우 아름답고 전통과는 단단히 거리가 먼 건축작품과는 별개로 가우디는 말 그대로 골수 보수 가톨릭 교도였으며 스페인인의 부정적인 모습은 다 보이고 다니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가우디 그 자신의 건축스타일은 전위적인 아방가르드 스타일보다는 치밀한 전통 계승과 일화의 해석, 우의와 의뢰인을 절대적으로 위하는 방식이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의뢰인들이 원해서 그런 형태로 지은 것이다. 사실 의뢰주의 면면을 보면 거의 자본가나 귀족층이었고, 그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던 만큼 그 역시 보수주의자이긴 했지만 카탈루냐 지역주의자였으며 스스로도 카탈루냐 밖을 좀처럼 떠나지 않았다.

또한 극단적인 채식주의자이기도 했다. 애시당초 말년의 건강 악화의 원인은 다 이것 때문이라 봐도 무방하다.

건축 성향은 카탈로니아 전통 복고주의 + 아르누보 정도로 대개 분류되지만, 그 자신의 다방면에 걸친 광범위한 취향과 건축주들의 다양한 요구를 소화시키려는 노력에 의해,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신고전주의 등등 서양 전통 뿐만 아니라 인도, 이집트, 중국, 마야와 잉카, 역사 이전의 석기시대 건축들, 오컬트 신비주의, 심지어 곤충이나 식물등 동물들의 형태에서까지 모티브를 따와 건축물에 반영하면서, 그 이전이나 이후나 볼 수 없는 독특한 건축물이 완성되었다. 거기에는 기존 서양건축에서 고전건축을 리바이벌할 때 나타나는 엄격한 절차나 규칙이 무시되어 가우디만의 독특한 원칙에 의해 배치되었는데, 이건 사실 탈권위성이 강한 아르누보 예술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래서 가우디의 건축은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재발견되어 시대를 앞서간 포스트모던 건축으로 추앙받고 있다. 하지만 당대에는 주류였던 모더니즘을 벗어난 완전 독자적인 외딴 섬같은 건축이었고, 후대에 계승도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무튼 가우디의 양식은 가우디만의 것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며, 카탈로니아의 전통 건축을 자기식으로 해석하여 자신만의 양식으로 만든 것 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자신만의 양식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천재 건축가로 불리는 것은 아니다. 가우디의 건축물들은 그러한 독특함 속에 합리적인 구조와 기능 역시 가지고 있다. 일견 멋으로만 보이는 둥근 천장과 나무 같은 기둥들은 무게, 즉 힘의 흐름에 따라 정교하게 설계된 것이며, 아름다운 구조가 효율적인 구조라는 개념을 아주 잘 나타내주고 있다. 또한 채광이나 환기와 같은 건축물의 기능 역시 충실하게 설계 되었다는 점에서 대단하다. 한마디로 예술적인 감성과 치밀한 공학을 조화시킨 점에서 진정 천재라는 명성을 얻을 수 있었던 것.

4 트리비아 

가우디의 트레이드 마크 중 하나인 현란한 색감의 타일아트는 그의 독창적인 발상이라기보다는 주젭 마리아 주졸(Josep Maria Jujol, 1879~1949)과의 협업의 결과물이다. 가우디 본인은 색을 배합하는 능력이 그렇게 좋지는 않았다고. 실제로 그와 같이하지 않은 가우디의 작품에는 그러한 타일 장식이 없다.

주졸은 나중에 가우디의 스텝이 아니라 독립된 건축가로서 인정받기를 원했지만 성가족 대성당 같은 큰 프로젝트는 끝내 맡지 못했고, 대공황의 후폭풍으로 건축 경기가 완전히 시망하는(…) 바람에 1932년을 마지막으로 소규모 건축의뢰조차 받지 못한 채 교회나 주택 같은 자잘한 건물 보수만 하다가 세상을 뜨고 말았다.

5 작품 

  • 괄호는 건축기간입니다.

5.1 바르셀로나의 가우디 작품 

카사 비센스(1879~1888)
성가족 대성당{1883~건설 중(...)}[7]
구엘 별장(1884~1887)
구엘 궁전(1886~1889)
성 테레사 수녀원 학교(1888~1890)
카사 칼베트(1898~1890)
벨예스구아르드(1900~1909)
구엘 공원(1900~1914)
미라예스 농장
카사 바트요(1904~1906)
카사 밀라(1906~1910)

5.2 카탈루냐의 가우디 작품 

구엘 술창고
몬세라트 성지 보수공사
팔마 대성당 보수공사
구엘 성지(성당)(1887~1918)[8]

5.3 스페인의 가우디 작품 

엘 카프리초 별장(1883~1885)
아스토르가 주교관(1887~1893)
카사 데 로스 보티네스(1892~18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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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타일을 베이스로 한 아랍식 저택으로, 가우디의 건물이지만 사적인 건물이라 출입불가.
  • [2] 그리고 이 때부터 가우디는 낭비 전문 건축가임! 이라는 루머가 돌기 시작했다.
  • [3] 바로 이 해 가우디는 성가족 대성당을 건축하기 시작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성가족 종단에서 원래 건축가를 갈아치우고 가우디를 임명한 것.
  • [4] 꼭 그렇다고 보긴 어렵지만, 언론에서 가장 자주 이야기하는 건축가인 것은 분명했다.
  • [5] 무시무시한 규모의 설계를 하였다는 게 문제겠지만, 성가족 대성당의 교구가 유지되려면 일정 규모의 거대한 성당은 반드시 필요했다. 절대 어딘가 맛이 간 설계는 아니었다. 성 가족 성당은 착공 당시부터 공사기간을 200년으로 상정하고 있었다. 속죄 교회로서 후원금으로만 지어질 건축물이었기 때문이다.
  • [6] 성 가족 성당의 수난의 파사드 부분을 맡은 수비라치는 이미 가우디를 성자로 간주하여 조각사이에 가우디의 옆모습을 본따 끼워 넣어 두었다.
  • [7] 가우디가 살아있을 때 완성된 부분은 지하제실, 탄생의 파사드, 네 개의 탑 정도에 불과했다.
  • [8] 원래는 성당을 지으려 했지만 지하제실 공사에서 멈추었다. 사실 성당이라기보다는 노동자 주거단지를 짓는 것이 목표였기도 했다.


아래 사진은 구엘 공원이다 

구엘은 가우디의 후원자였으며 당대 굉장한 부자 였다고 한다. 구엘은 훗날 가우디가 말하기를 정말 돈을 제대로 쓸 줄아는 부자였다고 평가를 한다 그만큼 사람의 재능에 투자를 하는 사람이였고 가우디에 대해서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가우디가 디자인한 보도 블럭 비가 오면 마치 보도 블럭의 무늬가 살아서 움직이는 듯하게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위 사진 두개는 카사 바트요 건물이다